차창에 눌러붙은 빗방울 자국을 따라 꾹꾹 응시해본다. 얼룩은 제 때 지우지 않고 시기를 놓치면 더 많은 힘을 들여 걷어내야 하는데- 싶다가, 얼룩을 못 봤을 수도 있지, 지우고 싶지 않을 수도 있지- 얼룩덜룩한 기분으로 빠져든다.
버스 맨 뒷자리 오른쪽에 정신지체아로 보이는 사람이 앉아있었다. 뒤를 돌아 몰래 힐끔힐끔 쳐다봤는데 나의 그 시선을 훔쳐볼지 모르는 누군가가 의도하지 않은 시선으로 나의 시선을 바라볼까 움츠러들어 시선을 거두고 귀만 열었다. 욕을 하다가 껄껄 대다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다가-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저 아이는 욕을 하는걸까, 웃는걸까 궁금해졌다. 어떤 말이 들리고 어떤 그림이 보일까 상상을 하다가 나는 얼마나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가를 생각했다. 그 사이 그 아이에게 어디까지 가느냐고 내릴 곳은 아느냐고 묻고싶었지만 해코지를 당할까 겁이나 그만두었다. 잘 내렸을까.
- 한 치라도 나아질, 누군가가 조금은 더 행복해질 세상을 꿈꾼다는 나에게 왜 저사람(들)은 무의미하게 스쳐가는가. 굽은 몸뚱아리로 리어카를 끄는 저 할머니는 내 머릿 속 세상 사람이 아닌 것도 아닌데, 그의 자글자글한 주름과 닳은 조끼를 제쳐두고 휘발될 안타까움만으로 자족하는가. 그러니까 한 노인이 어딘가에서 차갑게 굶고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할 수 없다 생각하는 무력감이 위선처럼만 느껴질 때가 있다. 이것조차 어쩌면 자조하지만 아주가끔 분분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 '나밖에 말할 줄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다.'라는 글귀에 갇혀, 나의 기분 나의 생각 나의 과거를 말하는, '나'에 대해서만 말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말을 아껴야한다고 명령했다. 그런데 크나큰 오산이었다. 말의 양이 과한 사람이 가여운 것이 아니라, 타인에 대해 이해하지 않으려는 사람 즉 듣지 않으려는 사람이 가여운 것이더라. 그렇지만 누구나 외롭기에 그래서 이해받기 위해 그래서 이해하려 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이해하지 않고 듣지 않는 의지라기보다 이해할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능력의 영역같아서 더욱 외로워지는 뫼비우스의 굴레. 어떻게 해야 들을 수 있나, 이해할 수 있나. 타고난 다정쟁이 다감쟁이가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진부한 몇 가지 조언들이 있지만 그렇게 쉽게 내릴 답은 아닌 것 같다. 조금 더 진중해보자.
나는 소주에 강한가보다. 맛이 없는 게 함정.
각목이 들어있을 것 같은 드럼통 위에 양철판을 깐 닭꼬치집.
나는 요즘 별 생각이 없어서일까 별 말을 하지 않는다. 다시 듣는 게 재밌어졌다. 물론 내가 떠올려보지 못한 이야기에 대한 단어가 쏟아질 때면 무슨 소린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지만.
1. 솔루션 이전의 이야기들. 닮이 막 걸음마를 떼던 때의 이야기들. 그 때 그 사람들.
그리고 난 벌써 스물네살이구나.
재작년 가을만 하더라도 지금의 시간을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육촌쯤 되는 것 같은 그들의 얘기를 듣는데 기분이 묘했다. 날 어떻게 생각하기에 여기까지 함께 하자고 말을 했는지, 나는 어떤 청사진을 그리며 이곳까지 시간을 나눈건지.
때때로 우리와 나는 눈동자 색깔이 다르다고 느낀다. 색목인일 수도 이주민일 수도 재외동포일 수도. 조금 더 깊숙히 잠겨야겠다 미소짓는다.
눈동자 뒤의 뇌까지 뚫어보며 혼내고 때로는 등 툭툭 두드리며 괜찮다고 무심한듯 말하는 선배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아쉬움을 내쉰다. 나의 투명한 유리벽을 산산히 깨뜨리고 손을 건네는 로망은 강렬하다.
나는 어떤 선배가 되어야할까. 되고싶을까.
2. 수많은 사랑의 정의들.
연애적 사랑. 형제애-존재적 사랑.
복기하기에 실은 별 거 없는 말들이다.
어떠한 사랑의 형태든 탱글탱글한 방울토마토처럼 윤이 나야한다.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떠나간 후에 사랑이었지,
잡으려해도 잡히지 않는 안개를 휘저으며 사랑이었지,
발갛게 부어오른 상처에 부질없는 약을 바르며 사랑이었지,
하는 모든 미끄러진 사랑들은 늙은 것이다.
오랜만에 노희경의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를 읽고싶어졌다.
질기고 쫀득이는 꼬치와 술을 마시는 우리는 섬같았다. 섬의 주위로는 벌개진 얼굴의 아저씨들이 하루의 끝을 끝내듯이 마셔댔다. 취기에 절은 아저씨들은 휘청대고 여기서 쨍그랑 저기서 쨍그랑 거렸다. 소주병이 깨지고 맥주잔이 깨지고. 축가라도 울려퍼지듯 요상한 리듬으로 유리들이 깨져댔다. 이렇게 균열을 모조리 부셔버려야 하루가 끝나는걸까.
나는 무엇을 깨뜨려야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