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1. 실내에서도 바깥에 휘날리는 빗방울이 느껴지는 하루. 하늘에선 여우비가 내렸고 곧 봄이 올 것을 모든 사람이 직감했다.
어제는 유현아와 샤브샤브를 두 시간동안 먹으며 연애의 교훈에 대해 자성했다.
메마른 다짐들을 교환했고 칼칼한 육수는 뜨듯했다.
별 것 아닌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사랑인가-라는 요염한 생각도 스쳐갔고 월요일 낮에도 차가 막히는 도로의 신호등에서 팔짱끼고 호탕하게 웃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닮은 모습으로 자기위안을 했다. 그렇게 말해주어 고맙다는 말에 부디 너에게도 위안이 되었기를 바랬다.
그토록 씁쓸한 연애들에 미안해했지만 사랑쟁이들은 겹쳐진 우산 안에서 기약 없는 다음의 연애를 상상했다. 충분한 자격을 갖춰서 사정없이 지적하는 장면을 그렸다.
2. 요즘 유투브 VIP다. 데이터 거지.
금비에게 보내는 영상, 닮캠프 영상, 솔루션 영상들을 하릴없이 재생하기도 한다.
자꾸 그럴듯한 말만 늘어가서 꼰대가 될까봐 겁난다.
문장의 행간이 너무 넓군.
번외. 블로그를 공개하고 나서부터는, 아는 것들에 대해서는 더욱 솔직할 수 있어졌지만 모르는 것들에 대해서는 자기검열이 더 심해진 것 같다. 감안하기를.
3. 그간 속을 알 수 없는 동굴에 희미한 한 줄기의 빛이 드리워지는 자정의 밤.
처음에는 행복의 대가를 치뤄야하는 게 싫어서 외면했으므로 상처는 애초 태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랬더니 행복과 상처 양쪽 모두에 무뎌졌나보다. 누군가가 대가의 과정을 견뎌내는 것을 바라볼 때면 어느정도 이상 공감하기를 멈춘다. 상처의 크기와 깊이를 재는 건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서, 상처를 이해하는 게 훨씬 쉬워보인다.
이미 벌어진 일들을 이해하지 않거나 못한다는 것은 소화되지 않은 채로 기도에 막혀있는 느낌이라 일어난 과거들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이해의 혜택을 누린다. 비겁하다는 생각도 한다. 아직 깨끗한 인정이 익숙하지 않아서인가보다. 풀어말하면 사실에 대한 인정과 해석에 대한 인정이 비판적으로 분리되지 않아서인가보다.
'그럴 수 있지'나 '어쩔 수 없지'라는 말이 무책임한 비겁의 포장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또 그것만도 아닌가보다. 정말 답이 없는 질문, 결론이 나지 않는 시작이 있음을 견디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때는 어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절망하지도 낙관하지도 않고 혹은 오락가락하기도 하고, 어느 쪽이든 잃을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음을 방치하지도 서두르지도 않게 되는 그 때가 올까.
무튼, 관계에 있어서 시소의 불균형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누구도 인정하기 힘든 사실인가보다. 누가 더 사랑하느냐, 덜 사랑하느냐. 누가 관계의 주도권을 가진 갑이냐 을이냐. 뭐 이런 질문이 다있냐며 코웃음치게 되는 것들이지만 조금만 솔직해보자면 이건 존재의 키를 쥐고 있을 수도 있다. 게다가 이런 질문은 사실, 순간적으로 덜 사랑하고 을인 주체가 품는 질문이라고 한다면 더욱 필사적이게 되는 질문. 약자는 슈퍼을이 되는 무한궤도?
생각이 산으로 갔다.
나의 상처가 있고 너의 상처가 있을 때 당연히 나의 상처가 더 짙게 느껴진다. 더이상 품을 수 없어 터져버린 관계의 끝을 어떻게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매듭을 예쁘게 짓는 것은 사실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헤어짐을 인정하는 것은 시간이 흐르면 될 일이고, 풀리지 않는 의문은 '왜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는가. 나는 무엇을 했는가.' 아쉬움과 서운함에 대한 답이다. 답은 잘 내려보길.
찌질함이 부끄러움과 솔직함의 복합체로 치환되는 것 같은데, 대체 찌질한 건 무엇일까. 사전적 정의는 지지리도 못나서 때려주고싶을 정도의 것이라 한다. 두려움은 일어나지 않은 불확실함에서 만약의 부정적인 상황을 떠올릴 때 발생한다. 불안하지 않는 게 어려운 건, '적당'을 벗어난 결핍이든 과잉이든 모두 부정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모든 미래는 지금 당장 존재하는 죽은 박제가 아니기에 통제할 수 없다는 건 명명백백히 아는 사실이다. 다만 내가 그 미래를 통제할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느냐에 대한 믿음/신뢰를 가지는 게 겁을 조절할 수 있는 스위치일텐데, 믿음/신뢰를 부여하는 주체가 당사자가 아닐 때 상심은 한층 가까워진다.
관계에서가 그렇잖아. 나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그래서 겁쟁이가 되는 건 어쩌면 너무나도 인간적인 일이다. 비대칭 속에서 솔직함을 드러내려는 건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데 그럴 용기는 아무리 맛있는 걸 먹어도 도통 생겨나지가 않는다. 나에게 너무 중요해서 이렇게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을, 그래서 무거워진 것들을 어떻게 혼자 감당하고 극복할 수 있단 말인가.
겁 먹는 건 못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찌질한 것도 아니다. 다만 관계는 솔직해야한다. 그건 잘 알고 있다. 조금 더 적확히 말한다면, 솔직해야한다기보다는 거짓말을 하면 안된다. 말을 하지 않는 것을 거짓말이라 할 때도 있지만 말이다.
나이브하지만 근본적인 위로는, 찌질함에 대한 찌질함조차 사랑스럽다는 것 뿐이겠지만.
4. 무언가인지 모르겠으나 계속 멀어져가고 손가락 틈새로 새어나가는 것만 같은 기운이 도는 나날들. 그 사이로 별의 별 말들이 구멍을 채운다.
- 짝사랑이 너무너무 힘들어 그만 멈춰야할지 고민하는 누군가에게 "너는 너 자신을 졸라 사랑하는구나"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속으로 '오 시벌'했다. 자기연민과 자의식범람이라 말한다면 잔인하게 들릴 수 있겠으나 틀렸다고 부정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일정부분 예리한 지적.
- 너무 웃긴 게, 내가 그래서인지 주위 사람들마다, 심지어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조차 (지난/현재) 이별의 얘기를 서스럼없이 꺼낸다. 미안함과 아쉬움으로 가득찬 반성을 하는 게 엄청 웃겼다.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다들 그정도의 연애를 했고 이정도의 가벼움을 얘기하게 됐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