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연 여름이다. 하늘이 탁해서인지 아무리 샤워를 해도 그리 청명해지지가 않는다. 망각을 껍처럼 씹듯 하루살이를 살아간다. 흐붓하게 연애를 하고 이따금 책을 읽고 맛있는 음식들로 배를 가득 채우고 끊어질 법한 매듭을 엮어가며 사람들을 챙긴다. 그리고 벌써 유월도 절반을 넘어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는 듯하다. 이렇게 오월과 유월은 충실했고 불안에 휘둘리지 않았다.

신기한 두 달이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스케쥴러를 펴고 달력 어플을 켜서 하루의 일정과 해야 할 것을 정리하고 구멍을 메꾸려는 의젓함에 오 분씩은 흐뭇해했다. 진공 지퍼막처럼 한 방울도 새어나가지 않는 시간을 끌어안으면서 내 삶은 아직 안정하다고 다독이던 매일 아침이었다. 오늘도 행복한 사람들과 행복한 이야기를 나누고 자뭇 심각하고 진지한 고민들을 헤쳐나가는, 그 정도의 정직함과 약삭빠름. 그러다가 두 달이 조금 못되는 시간동안 하루를 마다하고 아침의 이슬벌레가 된 기분이다. 이 기분이 무엇이냐면, 해가 뉘엿뉘엿 지면서 밤이 다가오면 조금은 부끄러워지고, 새벽의 안개를 지나 아침의 서리가 앉으면서 밝음이 찾아오면 다시 안심하는 마음이다. 그럼 이 기분은 왜 드느냐. 내가 소중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조차, 그들과 술 한 잔을 기울일 때조차, 위잉위잉거리는 소음으로 조금은 먹먹해지면서 내 마음만 말했던 탓이다. 그렇게 그들과 주(酒)님은 나의 서러움과 나르시시즘을 채워줄 밑거름이었던 탓일 게다. 다시 말해서, 나는 나의 이야기가 그렇게 안쓰럽고 극적일 수가 없었고, 그 이야기들과 시간들의 반복은 우리들의 스물을 덧대입히기만 했던 것 같다. 따스히 말하자면 감상과 낭만이고, 냉정히 말하자면 지랄염병이었다. 이렇게 비하 아닌 비하를 하는 이유는, 그것은 예전 일기에서도 썼듯이, 그 누구를 위함도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도 구원되지도, 이해받지도, 보듬어지지도 않는 그 공허한 지껄임은 우리를 마냥 촉촉하게만 했다. 그리고 그 끝에 미안하다고 말한다. 나는 조금 더 현실주의자였어야 했다. 나는 조금 더 실용주의자였어야 했다. 같은 말을 다른 표현으로, 다른 정도로 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임에 틀림 없지만, 우리의 자존과 생이 걸릴만큼 중대한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걸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우리는 조금 더 담백하게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우리는 누군가 혹은 누군가의 이야기에 거나하게 취하기보다, 정말 술에 취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덜 찝찝했을까. 아쉬운 시간들이다.

이야기가 술로 샜다. 겨울 이후로 처음 얼큰히 취하고 싶다는 생각을 최근에 문득 해서일 것이다.

다시 돌아가 왜 나는 최근에 이슬벌레에 빙의했느냐.

서두가 길었으나, 명확하게 저 이유에서이다. 세상의 만물이 애처롭고 서러워 어찌할 줄 몰랐던 시간들에서 어떤 경로였는지 어쨌든 그 통로를 지나 지금 서있는 곳에서는 울렁이지 않는다. 까슬하게 까칠한 말로 표현하자면 바싹 타들어가 메마른 공감력일테고, 이슬벌레의 촉촉함으로 말해보자면 집중할 감정이 생겨 굳이 에너지를 나를 위해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일 테다. 그러니까 사랑, 조금 더 적확하자면 사랑과 사랑에서 가지친 감정들을 제외하고는 별다르게 애잔할 일이 없다. 그래서 때로는 지나치게 솔직하다. 때로는 지나치게 비겁하다. 우유니사막에 가보고 싶지만 가진 않을 것 같다. 그 곳에는 걸음마다 자신이 발 밑 아래에 비칠테니까. 하늘을 보지 않으면 미아가 될 것 같은 곳이다. 각설하고, 그렇게 자꾸 나의 위선과 위악들을 종종 마주한다. 곱씹어볼 필요가 있는 것들이고, 더 좋은 사람(의 실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으로 나아가기 위해 정리할 필요가 있는 것 같은 면면들이다. 그래서 너에게 꽤 고맙고 미안하고 또 감사해지는 마음들이다.

감정과 그를 둘러싼 관계들을 분석하고 정의하는 데 몇 년의 에너지를 쏟아부었지만 요새는 그러고 있지 않다. 행동으로 옮기거나 그대로 휘발되곤 하는데, 가끔은 이렇게 기술하여도 좋을 것 같다. 리은이와 엊그제도 얘기했던 바이지만, 관찰일지를 써보고 싶다. 상대는 어떤 하루를 보내는가, 어떤 말투를 구사하는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가, 등등에 대하여 연구를 하는거다. 기간은 길지 않았으면 좋겠고, 방학 때 한 번 해볼 생각이다. 물리 레포트나 잘 써야지.....


그래, 오늘의 일기는 이것이 아니었다. 오랜만의 술술 써내려가는 일기의 오발탄은, 바로 어제 먹은 무슨 쪼꼬ㅉ꼬쪼꼬ㅉ꼬쪼꼬 프라푸치노(맞나?)였다. 핵심은 쉐이크에 갈린 커피콩 가루였는데, 아 대체 기억나진 않지만 언젠가 어디서 매우 자주 먹었던 기억이 있었다. 비슷한 여름날이었고 꿉꿉한 감정들로 가득찼던 때였던 것 같았다.

그래서 아마 대충 1학년의, 3년 전의, 혜화정도겠지-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현희와 대학로 어딘가 근처에서 먹었겠지, 라고 넘겼는데,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도 그 맛이 자꾸 맴도는 거였다. 이건 반드시 규명해내야한다고 다짐하고 스타벅스에 들어왔는데, 초인간적인 집중력으로 떠올려냈다. 바로 재수 때의 OOO커피였다. 아, 또 OOO는 기억이 안나. 하지만 마지막 퍼즐 조각처럼 하나 쯤은 남겨둬야지. 울산에 찾아가면 아마 없겠지만 그래도 차창밖으로 지나면서 다시 침을 꼴깍 삼키겠지.


무튼, 오랜만에 감상의 새싹이 옴트는 오후이다. 비가 곧 쏟아질듯이 낮게 깔려있고 에어컨 바람은 차디차다. 여름의 반증. 밤에는 뮤지컬 <빨래>를 보러 간다. 학생회 사람들-이렇게 지칭하는 게 너무 웃기다ㅋㅋㅋㅋ이 웃김은 분명 분석되어야 한다-이 자꾸 만나자고 연락을 해오고, 2013년의 헤어지던 여름처럼 보고서는 끝을 연장시키기 위한 몸부림으로 해결되지 않았고, 배는 조금 고프다. 보고서가 끝날 쯤엔 이번 학기를 마무리하는 글을 길게 하나정도 쓸테고, 그렇다면 다음학기 계획까지 짤테고, 그런 후에는 사람들을 만나 내 입장을 명확히 밝힐테고, 나는 중심을 잘 잡으려 무던히도 애를 쓸테고, 그렇게 여름은 또 뜨겁게 흐를테다. 흐름 없는 일기가 오랜만이라 너무 반갑다. 주르륵 샤워기처럼 쏟아져내리는 글이 얼마만이던가. 삭히고 삭히지 않아도 편안하다는 게 위로가 된다.


아, 정말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물론 싫지 않은 것을 좋은 것으로 만들 수는 있다. 그래야 하고, 그럴 수 있어야 우리는 가장 현명하고 영리한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는, 나는 무엇으로 가장 행복한가에 대한 고민을 다시 뒤적여야 할 때인 것 같다. 자꾸 지금이 2015년임을 까먹는다. 이 환상에서 깨어 으왕 울음을 터뜨리지 않도록 잘 채비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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