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고장 나버린 연어일까. 이곳이 상류일까 하류일까. 어김없이 돌아왔다.
듬성듬성 일기를 쓰기 시작한지 6년을 지나 햇수로 7년째가 시작되었다. 농염하고 은밀한 우울을 배설하기 위해 써왔다고 생각했으나, 다시 읽어본 지금은 마침표를 찍기 전 다짐의 한 문장들이 늘 나를 늪에서 건져 올렸던 것이었다. 그렇게 써왔다. 쓰디 쓴 숙명에 대해 썼고 침 고이게 신 비굴에 대해 썼고 비릿한 자존에 대해 썼다. 달콤함은 소금처럼 필요했으나 소금처럼 궁색하게 짜게 굴었다. 그런 것들을 써왔다. 늘 다른 것을 쓰겠다고 다짐하며 새로운 링크를 개설했으나 나와의 놀이에서 매번 속절없이 졌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다짐하지 않는다. 설운듯 울지 않고 담담하게 쓰는 법. 테크니컬한 글을 쓰는 것. 목적이 아니라 오직 수단이다.
'비로소'는 이전과 다른 상태로 전환되는 현재에 쓰이는 부사다. '마침내'보다는 극적이고 '드디어'보다는 덜 부산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에서 '비로소'로의 전환이 전복적이길 바란다. '무엇'이 되고자 애썼다면 이제는 무엇이든 '되는데' 애쓸 일이다.
처절함과 지독함이 뒤섞인 한 해였다. 분명 행복의 총량이 커졌는데, 더욱 분명한 절망의 총량이 많은 걸 희석시켰다. 나는 나를 지킬 필요가 있다. 더이상 윤리일랑 옆에 두는 것일 뿐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다. 자와 타에서 자를, 윤리와 욕망에서 욕망을 선택하기를. 이것이 괴물이 되지 않는 길이라 새겨본다.
강아솔 노래를 듣고 있다며 기나긴 문자를 쉼의 간격으로 보내왔다. 현희가. 자꾸 목울멍에서 물컹한 것이 움직인다. 그립고 보고싶은 것도 사실이다. 답장을 하긴 해야겠다. 다만 연락을 지속하거나 만나는 일은 없을테다. 나의 역사를 통틀어 아주 오랜 기간 휘젓고 폐허로 만들었던 기억들. 나는 바보가 아니다.
생생한 꿈은 현실을 탐낸다. 들불처럼 절망을 번지게하는 꿈이다. 죽이고 싶은 사람이 생겼고 사랑하되 증오하는 사람이 생겼고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주위 사람들과 신촌 곳곳이 생겼다. 자기연민이나 자의식과잉을 위시하는 사람들을 혐오할까봐, 사랑하는 사람에게 소리지를까봐, 사람들과 나눌 얘기가 독얘기밖에 없을까봐. 이모든 것들이 어느정도 진척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나는 괴물이 되기 싫다. 나도 제발 잊고 싶다. 제발 세상과 화해하고싶다. 이따금씩 명치를 움켜쥐고 뜯어내고도 싶지만 나는 괴물이 되기 싫다.
나를 해치는 것이 무엇이든 끊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비록 내게 어떤 류의 어떤 것들을 준다 할지라도.
잘 살고싶다. 이제 그만 이것들로 괴로워하고 이 썩은내 나는 땅에서 발을 떼고 싶다. 앞으로 그 전진의 발자국들을 기록할 거다.
비로소 나는 여기를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 떠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