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도록 영화를 보려고 사투를 벌이다 비자카드 결제까지 완료한 후에 영화를 재생한 채로 앉아 잠들었다.
뻐근한 아침을 깨우고 대청소를 하고 앨범을 한 장 한 장 조심스레 닦았다. 반대편 창문을 열어 이불들도 햇볕 쬐게 해주고.
부자가 된 것만 같은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면 잘 보냈다 소문이 날까 고민을 하다가 노트북만 챙겨서 나왔다.
요란한 신촌, 북적이는 신촌. 연세로가 생기고 난 후로 르네상스를 맞은 新村은 언제나 사람들로 들끓었다. 저많은 사람들은 대체 어디에 숨어있다가 주말만 되면 나타나는걸까 신기했다. 그래도 주말에 최소한 신촌의 사람들은 쉴 수 있구나 안도했다.
오늘은 사람 말고 하늘과 바람 좀 보고 싶었는데 골목길을 돌자마자 아찔한 풍경이 나타났다. 그래도 꽃들과 향들이 있어 좋았다. 근데 좀 섬세하게 공간배치하고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맥락없이 인디스러운 것들만 모조리 모아놓으니까 그냥 그렇다. 전주비빔밥 같아. 전주가고 싶다. 내가 갔던 2012년의 전주는 아직 핫해지기 전이라 볼 것도 없었고 투박했다. 다시 가게 된다면 프로메와의 지프를 그리워하게 될까. 근데 뭐, 환식이부터 없는데 추억하는 게 웃기긴하다. 바다보러가고싶다. 다음주면 드디어 바다를 볼 수 있어! 와우 판타스틱. 살 것 같다. 세영이도 보고.
자주 문득 현희 생각이 난다. 당장이라도 제주도 비행편을 끊을까. 찾아가 아무 일 없었다는듯 낯 두껍게 뻔뻔히 굴어볼까. 시험기간은 잘 보냈을까. 오늘 광화문에 갈까. 마주칠까. 우리가 사월과 오월을 보낸 적은 여태껏 잘 없었던 것 같은데, 이번은 정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같이 있기만이라도 하면 어떨까,라고 말해볼까. 갑자기 너무 쓸쓸해진다.
페미니즘과 사회학 과제 책을 사려고 홍익문고에 가는 길, 알바노조의 서명을 봤다. '알바노조'라니. 노동조합은 바람직한 집단행동이나 앞에 붙은 '알바'의 어감이 참. 애초에 있어선 안될 '알바''노조'인데, 무튼 타성적으로 서명을 했다. 요즘들어 '힘내세요'라는 말을 입에 단듯이 하고 산다. 세월호에도 비정규직 노동자분들께도. 힘 좀 내게 하지마 그지같은 세상아. 투쟁으로 얻어내야하는 행복이라니, 정말 사랑과 행복은 쟁취해내야하는건가. 홍익문고에 갔더니 재고가 없어 바로 광화문으로 갔다.
교보문고에도 재고가 없었다. 오랜만에 간 교보문고는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져있었다. 사람이 많은 주말이라서일까. 특유의 책냄새가 나질 않았다. 페미니즘 제출이 머지 않았는데 재고가 없어 초조해서 다시 신촌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책들도 사고 싶어서 홍익문고에 재고를 알아보려 전화를 했다.
"재고 상황을 여쭈려고 전화드렸는데요, '아만자' 있나요?"
"책 이름이 '아만자'인가요?"(나의 인식)
"네. 아.만.자.요"
"암환자 책은 너무 많아서요, 출판사 이름 좀 말해주세요."
"아, 책 이름이 '아' '만' '자'에요."
"그러니까 암환자요."
(그냥 교보문고에서 사야겠다고 마음 먹음...)
저 대화를 할 때는 내가 알기로 매우 인기있는 책인데 서점에서 일하시는 분이 힙하지 않으신가보다ㅋㅋㅋ라고 생각했는데, 돌아와 떠올려보니 정말 신기한거였다.
처음 '아만자' 웹툰을 보게 되었을 때는 학교 서문의 밥집 '아만도' 같이, 러시아 어를 가차해서 사용한 것이겠지-라고 대충 넘어갔는데, 해온이랑 밥을 먹던 날, '아만자'가 '암환자'라는 뜻이래, 라고 말했을 때 약간의 충격을 받았었다.
그리고 오늘의 통화에서는 내가 아무리 '아만자'라고 말해도 '암환자'로 알아들으시는거다.
한 글자씩 떨어뜨려 아, 만, 자, 요. 라고까지 했는데도 말이다.
지면과 음성으로 들을 때의 차이인건가?
오히려 명확할 때 더욱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있는 그대로'에서 한정사가 붙으면 그 이상을 볼 수가 없나보다.
몇 가지의 말들이 스쳐갔다. 그 말들에 묶여서 서성이던 때들, 그 말들 확인받고자 혹은 정확한 의미를 파고들고자 다른 건 보지 않았을 때들. 있는 그대로를 안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수잔 손택의 말> 책도 샀다. 오늘 할 게 너무 많아서 서문만 읽었지만 허지혜에게도 읽게 해주고 싶다.
책에게 위로받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관성적으로 힘겨워하던 것들을 떨쳐낼 수 있을 것 같다. 얼른 이 책들을 캐리어에 던져 넣어서 다음주에 집으로 가야지!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세월호 노란 풍선이 도로에 나뒹굴었다. 풍선이 뻥 터지면 아주 멀리서도 놀랄 것만 같아서 치우려고 풍선을 주웠는데 도통 버릴 데가 없었다. 쓰레기통 입구가 작아서 들어가질 않는거다. 그래서 터뜨려서 버려야하나 고민을 했다. 그럼 주위 사람들에게 저 지금부터 풍선 터뜨리니까 놀라지 마세요! 라고 말을 해야하나 고민을 했다. 근데 어떤 사람이 다가와서 그거 터뜨려서 버리실 거에요? 라고 물으셔서 네, 그래야 할 것 같아요, 라고 대답했다. 둘 다 잠시 고민을 했다.
그 사람은 천재였다. 풍선 막대에서 풍선을 분리해서 바람을 빼면 되더라. 그 사람은 정말 천재다. 진심으로 감동했다.
버스에 올라타서 바람 많이 부는 오늘 부대끼던 풍선이 어디선가 뻥! 터지면서 <분노의 질주>에 나오는 것처럼 차가 스키드 마크를 남기며 정지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아, 기분 좋다.
이렇게 보냈는데도 아직 해가 안졌다. 물론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밤엔 꼭 해야지.
지하철을 타고 광화문에 가는 길은 언제나 낯설다. 그 터널같은 길을 걷는 동안 딱 두 가지의 생각을 했다.
현희가 많이 보고싶었다. 더 잘 할 수 있다고 수표를 남발하고 싶었다.
두 번째는 당신에게 내가 아직 좋아하기에 떠날 수밖에 없다고 말을 하고싶었다.
한강 가서 아이스박스에 담긴 맥주 벌컥벌컥 마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