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을 말한다. 안녕을 말하는 건 꽤 설레는 일이다. 반갑다는 인사의 안녕이든, 잘 가라는 인사의 안녕이든, 나는 당신의 안녕을 온 마음 다해 바라기에. 나와 마주했기에 당신이 안녕할 수도 있고, 나와 헤어지기에 당신이 안녕할 수도 있다. 아니, 사실 나는 그러한 가능성의 파릇파릇함보다, 당신을 만났다면 시작으로 인해 당신이 안녕하기를, 당신과 헤어졌다면 이별로 인해 당신이 안녕하기를, 간절히 소망하여 기필코 그렇게 해내겠다는 의지의 서슬퍼럼이다.
바투 자세를 다잡는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어깨를 펴고 지긋이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초점을 맞춰본다. 이게 내가 이별을 맞이하는 자세이다. 뿌연 봄날이다. 비는 세상을 씻지 못하고 하늘은 저의 일이 아니라는듯 무심하다. 그렇게 잔인한 사월이 가고 나도 간다.
건너갈 수 없는 섬처럼 나는 그 때에 있다.
변할 수 없는 바위처럼 나는 그 곳에 있다.
이렇게 삶이 멀어만 느껴지고 아무리 사람을 만져도 반박자 어긋나기만 할 때,
그럴 때 나는 확실한 하나의 이별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하나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순례자의 길과 떠돌이의 길은 방황의 측면에서 그리 다르지 않다. 깃발이 있느냐 없느냐, 그것의 차이일 뿐.
남은 사월의 잔인함을 이제는 더이상 견뎌내지 않아도 된다. 잊는 것이 아니라 잊혀지는 것이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떠나가는 것이다.
모든 것이 원망스러울 때가 있다.
두 발로 걷는 사람들이 물리적으로 전진한다는 것이 원망스럽다.
해가 떠있는데 지까짓 게 뭔데 또 죽은 빛을 뿜는 형광등이 역겹다.
가지런히 세워진 책들이 가식적이게만 보인다.
삼년 전 구월인가 시월인가, 지영이가 그랬다. 유진아 너무 이성적이려고 하지마. 너무 바르려고 하지마.
그 때의 둔탁함이 여전히 내게 머무는 것도, 그 둔탁함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번에는 내가 떠난다. 불행하지 않도록.
그간 비겁했다.
앞에선 발설하는듯 연기했고 뒤에선 침묵의 무게를 애썼으며
뒤에선 발설하는듯 통곡했고 앞에선 침묵의 메아리만 반복했다.
괜찮던 서너달의 시간이 며칠만에 와르르 무너져내린다.
계속 괜찮을거라 다독였고
나에게 괜찮을 거라 한 말은, 사실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못해서였으며
그래서 난 더욱 당신에게 미안하다고 읖조려야했고
마침내 고맙다고, 고맙다고, 정말 고맙다고, 고백했어야했다.
나에게 발설을 마쳤다.
이제 당신에게 발설할 시간이다.
나는, 언제나, 여전히, 언제까지라도, 당신이 안녕하길 바란다.
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