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대하여


부제 : 


언어의 성김과 중독성을 안다. 생각하는, 느끼는 모든 것을 말로 표현하기에 언어는 턱없이 부족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출하지 않으면 폭발할 것 같은 충동에 언어는 쓰여져야만한다. 가장 정확하고 또렷하게 기술하려는 이 욕망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로켓을 타고 외계행성에 도착하는 순간, 그 때가 욕망이 모두 소멸하는 날이겠지.


언어화 하려는 욕망 중, 관계가 갖는 의미, 즉 ‘너는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나는 너에게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답을 탐구하려는 시도는 복잡한만큼 강력하다. 숨도 쉬지 않고 심장도 뛰지 않은 채로 내 손목에 채워져있는 시계는 나에게 없어선 안될 존재인데 사람의 의미에 대해 말해 무엇하랴. 무엇한다. 나는 이 무엇하려는 행위를 떠올릴 때면 매일 밤마다 서걱거리는 느낌을 받는다. (너의)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그래서 (나의)존재를 증명받기 위한 이 무엇하려는 몸부림이 그림자의 춤만 같아서. 우리는 끝끝내 서로에게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가까워질 수 있을 뿐이다. 심지어 가까워지는 것이 서로인지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장담할 수 없는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울고 웃고 슬퍼하고 기뻐하는 군상이 부질없다고 오만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마음을 고쳐먹기로 한 것은 누구의 계도로 인해서도 아니고 운명적 깨달음 때문도 아닌, 온 몸을 간지럽히는 외로움 때문이었던 것 같다.

완벽한 섹스(백마디 애 쓴 말보다 한 번의 섹스가 훨씬 효율적이고 정밀하게 마음을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도 운명적 고독(혹은 외로움=고독)을 이길 수 없다. 자석의 같은 극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가까워질 뿐 만날 수 없다는 사실. 하지만 자꾸만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산꼭대기로 올리는 시지프인 나는 쉼없이 합일을 향한 언덕을 올라야한다는 사실. 우리는 언제나 영원히 연결되어 있는 타인.


이런 가여운 존재들을 향한 구원의 손길을 사랑이라 부르기도 한다. 나는 ‘사랑’이 ‘구원’과 한 문장에 들어있을 때면 종교적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 무언가 께림칙해져서 별로 내키진 않는다. 게다가 고작 사랑 따위가 불완전한 인간 존재를 모든 나쁨/고통들에서 해방시켜주는 구원이라니, 사랑을 하는 것보다 은총을 받는 것이 훨씬 쉬워보인다. 무튼, 이런 구원이니 생의 궁극적 종착역이니 하는 사랑의 위대함은 접고싶다.

나는 사랑이 쉽고 싶다. 사랑이 남용되고 넘쳐흘렀으면 좋겠다. 너무 소중하고 특별해서 닳아 사라질까 걱정되어도 괜찮다. 이건 무한동력이라 믿고싶다.


그럼, 대체 사랑이 무엇이란거지.

한자어도 아니라서 풀어 설명할 수도 없다. 사전적 의미는 너무 협소하다.

내가 느끼는 사랑의 유형들을 추적해보기로한다. 솔직해져보자.


1. 존재적 사랑

한솔 진영과 어느 뒷골목에서 닭꼬치를 먹으며 나눴던 얘기들에서 따온 단어이다. 물론 우리 셋은 모두 이 어휘를 다르게 해석하고 있지만.

나는 존재적 사랑은 곧 감상/정/마음의 움직임과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존재적 사랑의 대상은 인간/생물/무생물을 가리지 않는다. 모든 존재하는 것-가시적이건 비가시적이건, 정형적이건 비정형적이건-에 대한 마음의 파동이라는 뜻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밤길 휘영청 서있는 가로등을 보다가 조금이라도 찌릿했다면, 그 감정의 발로가 그 하루의 고단함이든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이든 그저 밝음의 이쁨이든간에 어쨌든 감정을 일으킨 모든 요소의 존재함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인 것이다. 살아움직이는 동물에게, 더욱 명징하게는 세상에 갓 나온 새끼에게 느껴지는 벅참은 명확한 존재적 사랑이다. 물리 화학적으로 존재하는 물질뿐만 아니라 머릿속에서 상상할 수 있는 추상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 상상조차도 사랑할 수 있다는 말. 그럼 당연히 인간에게는 자연스러운 존재적 사랑이다.(참고로 왜 인간이 다른 생물/무생물과 차별되는지는 인권을 공부하면서 거쳐야 할 고민이다. 까먹지 말자) 인간이 아무리 복잡한 생명체라해도 냉혹한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는 것에서부터 (건방지지만) 연민과 동정이 솟아난다. 그 어떤 비인간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과거역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존재만으로 발현되는 사랑, 존재적 사랑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사랑이라는 얘기다. 물론 이까짓 걸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근거는 없다. 그냥 그렇게 부르고 싶을 뿐이다.


2. 그 후의 사랑. 사랑의 단계들

이제부터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존재적 사랑은 쉽게 휘발되고 망각된다. 내가 느끼고 내가 해석하기에 어쩌면 나로 인한 나를 향한, 나에 대한 사랑이지, 우리는 아직 가까워지지 않았다.

나는 종종 금사빠이다. 빠지진 않지만 가벼운 호감을 잦은 빈도로 갖는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기대와 신뢰로 인함인지 나의 외로움이 커서인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관계에서 능동적이거나 적극적이지 않기 때문에 타인이 다가오거나 환경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감정을 발전시키지 않는다. (이러한 방어적이고 보수적인 관계맺음이 지금 나의 관계 매뉴얼에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공동의 경험, 유사한 코드,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함께 보낸 시공간의 양. 물론 때로는 이유가 없다. 어떻게 친해졌는지, 대상이 나에게 스며들었는지 인지하지 못한 채 나의 신경을 차지하는 관계들이 있다. 보통 다수의 관계들은 이 단계에 속한다. 이 단계도 정도에 따라 세분화되기는 한다. 굳이 분리해서 명명하지 않는 이유는, 이 단계에 속하는 관계 중, 내가 노력하고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마음으로 맺어지는 관계들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이 사람과 밥을 먹고싶다, 함께 걷고 싶다, 영화를 보고싶다, 나의 생각을 전하고 궁금한 것도 많다, 같은 표현이 나 자신에게 드러난다.

나라는 양파 씨앗의 여러 겹 중, 핵심에 조금 더 가까워지는 관계들이 이 단계에서 그렇지 않은 관계들과 구별되는 차이점은, 함께한 시간들이 경험/체험에서 끝나지 않고 추억으로 간직된다는 것과 우리 관계의 의미와 내용을 종종 상기시킨다는 것이다.

나는 보통 이것을 플라토닉 러브라 부른다. 정신적 사랑, 이라 부르기엔 낯간지럽고.


3. 사랑

거추장거릴 것 없이 순수하고 맑음의 정수, 사랑이라는 두 글자를 떠올릴 때면 소용돌이에 빠져 깊은 바다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해수면을 올려다보는 기분이다.

실은 아직도 정리가 되지 않아 이에 대한 이야기는 적을 수 없을 것 같다.

사랑의 징후/증상에 대해서는 써내려갈 수 있겠지만, 어떻게 작동하는지/어떤 영양분을 먹고 그 이상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지 등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 수도 짐작할 수도 없다.

요즘 사랑과 연애에 관한 고민들로 바늘로 찌르는듯한 두통을 종종 느껴서 더이상 분석하기를 그만뒀다. 그리고 더 깊숙히 고민한다 하더라도 결론은 같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든다.

이건 운명이다. 이기에 이유가 없다.



아직 멀었다. 이제 겨우 ‘사랑’의 유형에 관한 견해였을 뿐이다.

이제는 관계의 유형/양상을 알아야겠다. 지독한 고집같으니라고.


흔히 친구, 우정, 사랑, 연애이라는 구분법을 사용한다. 나는 귀찮아져 사랑(의 정도)과 관계(의 규정)으로 간략화하여 생각하려고 한다.


친구와 연인의 경계는 서투르게 잘라내듯 울퉁불퉁하다. 성적 호감/욕망을 가지면 연인인가? 성적 욕망이 발현되는 스킨십이란 것의 기준은 무엇일까? 손 잡기/포옹/뽀뽀/키스/섹스? 이 구분들로조차도 서투르다. 섬세한 터치, 공간을 감싸는 기류의 느낌 모두 나는 스킨십의 범주에 포함시키는데 그렇다면 흔히 말하는 연인/친구를 가르는 성적기준은 사회적으로 구성되어 분절된 것이겠지. 규정된 기준들은 나를 혼란스럽게 할 때가 있다. 어떤 날은 모르는 사람에게도 안기고 싶을 때가 있고 반짝이는 눈을 하며 말하는 상대를 바라볼 때 눈썹이며 미간이며 입술이며 다 만져보고싶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속성/빈도가 기준이 되나? 별로 좋은 논의가 될 것 같지 않아서 무시할거야.


사랑의 유형 중 플라토닉 러브가 보통의 사랑을 주고받는 베이스라면, 그 관계에서 연애로 변화하는 조건은 무엇일까? 그리고 연애를 한다는 것은 그 이전의 상황과 어떻게 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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