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대화
한강
죽음은 뒤돌아서 인사한다
"너는 삼켜질 거야."
검고 긴 그림자가 내 목줄기에 새겨진다.
아니,
나는 삼켜지지 않아.
이 운명의 체스판을
오래 끌 거야,
해가 지고 밤이 검고
검어져 다시
푸르러질 때까지
혀를 적실 거야
냄새 맡을 거야
겹겹이 밤의 소리를 듣고
겹겹이 밤의 색채를 읽고
당신 귓속에 노래할 거야
나직이, 더업이,
더없이 부드럽게.
그 노래에 취한 당신이
내 무릎에 깃들어
잠들 때까지.
죽음은 뒤돌아서 인사한다.
"너는 삼켜질 거야."
검은 그림자는 검푸른 그림자
검푸른
그림자
연휴동안 가족은 무엇일까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단상이라 부르기엔 민망할 만큼 관성화된 생각의 나열이라 반성이라 부르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가족애는 모든 사랑의 궁극인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무결의 사랑의 원형이라 믿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노력하지 않아도 힘들이지 않아도 나의 잘못은 없다고 핑계를 대고싶었던 것 같다. 내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만큼 엄마아빠에게 너무나도 자연발생적인 마음이라 별 문제가 될 것 없다 생각했었다. 이 무슨 이기적인 합리화란 말인가.
나의 꿈은 현모였다. 작고 연약한 생명체가 완성되는 과정을 지켜보고 진두지휘 하는 것. 어느것도 온전히 내 것이 없는 세상에서 나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를 품는다는 건 엄청 위대해보이는 일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므로 나는 신이 되는 것이니까.
완벽할 수 없는 나로부터 완벽한 누군가를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가진 것들과 가지지 못한 것들을 조합하고 걸러내서 세상 어디에도 없는 교육을 하는 것이 내 인생을 완성하는 마침표가 될 것 같았다. 열심히 배우고 공부하고 진리를 깨우쳐야만 했다. 그래야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과정 모두 흠 없는 순간들로 채울 재료들이 준비될테니.
그러다가 자격을 갖추는 것이 얼마나 아득한 일인지를 맞닥뜨리고는 그러기를 그만뒀던 것 같다. 해소되지 못한 완벽함을 향한 욕망은 다른 곳으로 겨눠졌던 걸까. 엄마아빠는 얼마나 피곤했을지 예상이 간다.
나의 차가움을 자책하고 경멸하면서도 그 냉철한 시크함이 내심 마음에 들었나보다. 심지어 태생적인 차가움을 타인에 따라 변하는 관계의 속성 탓이라고 자위했었나보다. 나는 충분히 따스한 사람일 수 있는데 선택하지 않은 관계들이기 때문에, 혹은 맞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차가울 뿐이라고 되뇌었었다. 기울일 수 있는 마음과 시간의 크기가 한정되는 어쩔 수 없음에 마음이 가지 않는 관계는 얼마든 후순위로 밀려나도 상관없다고. 이런 마음의 반향으로 나 또한 어떤 관계에서든 흔쾌히 물러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선택하지 않았다는 결론은 나를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줬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그건 나를 더 불쌍하게 만든 건 아니었을까-아차,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다. 선택하지 않은 관계들, 얇게 맺어졌으나 많은 시간을 함께했던 친구들을 자주 아쉬워했다. 우리의 다름에 대해, 불가항력으로 멀어지는 것에 대해, 아련한 뒷모습들을 곱씹곤했다.
엄마아빠는 나를 선택하지 않았고 나는 엄마아빠를 선택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서로를 알게될거라 기대했으나 모르는 사이. 모든 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런데 나는 얼마나 폭력적이게 근거없는 의무를 휘둘렀던걸까. 일방적인 내리사랑을 내세우는 내 등을 바라보는 게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한 순간에 우리의 끈이 쉽게 풀리거나 끈끈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같은 미안한 감상은 언제든 옅어질 수도 있고. 심하게 솔직하자면 사랑한다는 말이 텅 비게 들리기도 한다. 태어나서 눈을 뜨자마자 마주한 사람들에게 매달리는 의존. 정글의 세계에서 지켜주는 울타리로써 나를 대신해 대속하는 사람들에 대한 부채. 나의 역사를 지켜보고 함께하는 사람들에 대한 정. 이 정도가 가족애의 요소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을 가능케하는 동력은 부모의 선천적 사랑, 자식의 후천적 사랑이 아닐까-했었다. 부모에겐 선택권이 없고 자식에게만 선택권이 있는, 불균형의 관계.
그동안은 그럭저럭 괜찮게 주고받는 평화로운 사이였다. (시제가 중요하다.) 엄마아빠가 바람직하다 생각하는 인간상, 자식상에 적합하게 응답했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의 인격, 그 정도의 능력, 그 정도의 관계가 유지되어왔다고. 하지만 동상이몽이라 생각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적절한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나의 진심을 잘 가려왔고 엄마아빠는 베일에 가려진 진실을 대신한 껍데기에 만족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묵묵히 대화를 묻어왔고 화목한 사이었던 것 같다. 물론 지금 화목하지 않은 건 아니고 그런 것도 아니다. 위장된 진심이 드러나고 현실의 벽에 가까워질수록 벌어진 균열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나는 충분히 책임과 대가를 치뤘다고 주장했다. 나는 대가리가 커서 독립적인 주체가 된 것만 같았다. 뜨거운 이상들과 막 펼쳐진 자유를 거두기엔 나는 너무 거만했고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나의 세계에선 내 것만이 정답이었고 나의 삶에는 그 누구도 참견할 수 없다 믿었다.
이건 반성문이다.
아침 달그닥거리는 주방 소리에 잠에서 깼다. 여느 때처럼 잠들 때보다 이불은 정갈히 덮혀져있고 좋아하는 음식냄새가 풍겼다.
아침부터 부러질 것 같은 식탁에 앉아 스테이크를 썰면서 휴전은 다시 피어나기 시작했다.
모래성 같았던 마음과 치밀한 계획들을 따발총 쏘듯 뱉어냈다. 우리의 다름을, 얼마나 다른지를 무엇을 위해 말하는지도 모르는 채 말해댔다. 스테이크가 식어가는데도 명절의 권지웅처럼 낙담한 표정의 엄마아빠에게 이해를 요구하느라 포크를 내려놓고 손짓발짓을 했다.
아무리 이쁘고 그럴듯하게 쓰고싶어도 내가 저지른 파괴는 처참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사실 "내가 실패하고 못나도 감싸고 사랑해줄거야"라는 말 따위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속으로 나의 철없는 이기적임과 이상적임을 인정하면서도 지고싶지 않았나보다. 내가 주장하는 세상의 순리라는 것이 얼마나 치기어리고 오만한 투쟁인지를 알면서도 말이다. 견고하다고 생각하는 (사실 엄마아빠는 꽤 큰 변화들을 이뤄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아빠의 아성을 무너뜨려야 나의 절대적 피난처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에야 생각해보면, 그렇게 쏘아댄 것은 내가 소유된 것을 벗어나기 위함이 아니라, 부모님의 재정과 사랑을 이용해서 나의 소유로 만드려했던 시도였던 것도 같다. 또 하나의 이유는, 나의 치부와 결핍들을 정확하게 알고 짚어내는 엄마아빠의 쓰라린 말들을 직시하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나의 연약함은 그들의 탓도 책임도 아님에도 막무가내로 떼를 쓴 것이다.
아빠는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미안하다는 눈빛으로 아니라고 말했다. 우리는 너가 어떤 사람이라도 사랑한다고, 다만 걱정할 뿐이라고. 나는 대체 어떤 말로 얼마만큼의 상처를 준 것일까.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마구 퍼주었던 사랑을 모두 물거품으로 만든 말은 아니었을까.
심한 소용돌이가 마음 속에 몰아쳤지만 아무렇지 않다는듯, 우리는 결국 같은 곳-서로의 행복-을 바라보고 있으니 더 많이 솔직해지자는 당연한 말로 매듭을 지었다.
(시제가 중요했던 이유는, 나의 생각들이 모두 착각이었기 때문이다. 뒤틀린 마음과 단단한 선입견은 진짜의 사랑을 보지 못하게 하고 진실을 왜곡하니까.)
물론 나를 내리깎아 자책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무섭다는, 두렵다는, 겁난다는 핑계로 말을 아꼈고 이렇게 작은 참사를 낳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정말 부딪힐 수밖에 없는 다른 사람이기도 하다.
다만 너무나도 부끄러운 것은, 내가 사랑한/사랑하는/사랑할 존재 자체를 이해하려고 했던 것이 모순적이고 오만하다는 것이다.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이 자신감과 냉정함의 이유이진 않은데 말이다.
전리품으로 듣고 싶은 말을 들었다. 어떤 끝에서도 나를 지탱해줄 사랑/사람이 있음을. 아직 나의 울타리는 건재하다는 것을. 하지만 이것은 여유의 영양분이 되어야지, 화풀이를 할 무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서로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어야하는 것이지, 어떤 존재를 삼키고 잠식하는 것이어선 안된다.
이 모든 갈등의 시작은, 앞으로 주체(나를 비롯한 누구든)가 자신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 가족을 끊어내야하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대립되는 부모와 자식의 그림이 있을 때, 몇몇 사람들은 끌려다니지 말고 연결을 끊어내고 소신을 밀고 나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도 그 중 하나였고.
이런 '현상'이 한국의 가족관계에서만 나타나는건지는 모르겠다.
(아직도 피해의식이 벗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가족은 무엇인지, 어때야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기 위한 말들이다.)
자신이 낳은 자식을 자신의 욕망을 투사시킨 대리자, 내가 만든 소유물로 인식하는 것 같다. 독립적인 주체가 아니라 과도한 염려때문에 자식을 보호해야 할 존재로, 그래서 적극적으로 자식의 삶에 개입하다보니 적정한 거리를 상실한 것 같다. 나에게 그것은 구속과 억압으로 느껴기도 했다. 부모님은 방목 양육이라 할만큼 간섭하지도 조언과 강요로 옥죄이지도 않았지만, 나의 성향으로 나는 그렇게 느꼈기도, 그렇게 간주하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사람을 기르고 키우는 교육환경으로서 가족은 인간이 처음 마주하는 학교인데, 그 학교는 너무 편파적이라 생각했다. 부모의 가치관, 삶의 방법 등이 그대로 유전되는 것 같았다. 내가 처음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된 발로인데, 우리나라의 부모-학교는 부의 성공과 비인간적인 가치를 강조하는 것만 같았다.
어찌되었든 부모는 자신이 낳은 생명에 대해 책임감을 갖는 것이 보편이라 생각한다면, 양육과정에서 경제적 지원, 감정적 지원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하는 부모는 더욱 강한 애착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희생, 그로 인한 부채/대가라고 말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좀 더 명징한 감정의 인과가 있는 것 같은데 이것이 무엇일지 아직은 모르겠다. 그것이 보통 '사랑'이라고 말해지는 것 같긴 하지만.
그러니까 자식의 인생에 많은 관여를 하는 게 나는 너무 답답하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물론 '사랑하니까'라는 것을 알고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 나는 이상적인 '성숙한 거리'를 꿈꾸고 있다. 그 거리가 서로에 대한 이해와 존중으로 유지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만 그게 참 어렵다.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이 계속 부딪히게 되는 상황에서, 부모 자식은 몇 가지 방법을 강행한다.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거나 서로가 다르다는 선언으로 독립을 한다. 전자는 더이상의 부채를 차단함으로써 발언권을 빼앗고 후자는 앞으로 예정된 상충을 알아서 감당하자는 것이 아닐까. 좀 더 섬세히 말하자면, 경제적 독립을 하는 것은 서로에게 덧대진 불필요한 의무를 걷어내고 순수한 인간적 관계에서 서로를 맞이하자는 뜻이고, 다름을 말하는 것은 만날 수 없는 서로의 가치관/삶의 방식을 인정하고 마음을 비워재나는 뜻일테다. 어쨌든 두 가지 모두 다 묶여있던 가족 공동체에서 분리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깨끗한 한 방의 절단이 과연 서로를 위하는 길일까 하는 찝찝함이 남는다.
겹쳐진 여러 공동체들 중에서 가족공동체가 뒷전으로 밀려나는 것을 일시의 합의로 받아들일 수 있냐는 것이다. 잔인하게 들릴 지 모르겠지만 한 쪽은 그것이 자연스럽게 가능하다. 보통 그 한 쪽은 자식의 경우가 다수이고.
충분히 고민해야할 것은, 나는 부모란 존재와 부모를 이해하기 위해 얼마만큼의 노력을 다했는가, 우리의 멀어짐을 준비할 시간을 나눴는가, 이다.
그리고 나는 부모가 될 수 있을까. 그럴 자신이 있을까. 그럴 자격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