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때 먹은 쭈꾸미와 불고기가 아직 소화되지 않는다. 불어버린 매운 젤리처럼 뜨끈하게 계속해서 뱃 속에 남아있다. 고춧가루 몇 알이 온 장을 헤집고 다니는 것 같다.


가을바람은 늘, 매년마다, 나를 서글프게한다. 한 번씩 무엇을 상실했던 가을들의 징크스가 어김없이 찾아왔다.

홀린듯이 버스를 탔다. 너에게 연락을 할 수 없은 후로 서너달간 교통비는 0원이었다. 가방이 너무 무거웠지만 무작정 버스를 탔다. 아니, 타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게 더 맞다. 나의 머릴 보며 놀릴 너의 모습이 그려지는 게 너무 서러웠다.

사실 이런 서러움은 너 때문이 아니다. 오늘 어쩌다 아주 이상하게 폭우같은 서러움으로 불려갔다. 한참을 들여다봐도 누구의 사진인지 몰랐다. 큰고모, 작은고모, 큰아빠, 아빠의 어릴적 사진. 아빠가 갓 초등학교 입학할, 아니네 국민학교 입학할 쯤으로 보였다. 착시처럼 닮았다가 달랐다가 아른거리는 그 사진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아빠의 삶이 한순간에 아려왔고, 큰아빠의 죽음이 서럽도록 새겨졌고 고모들의 억척스러움이 가늘게 떨렸다. 갑자기 허리가 아픈 그 때에 왈칵 스러졌다.

그 순간 너가 보고싶었으리라.

그래서 나는 오늘 그냥 발걸음따라 버스를 탔으리라.

오는 길은 너무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폰 몇 번을 들여다보고, 오랜만에 낀 이어폰의 노래는 들릴 리 만무했고, 밖으로 보이는 궁들은 인공처럼 변하질 않았다. 내릴 정류장을 놓쳐 그냥 타고만 있었다. 사람들이 듬성했던 버스에 정신을 차려보니 밀물처럼 들어찼다. 가을의 에어컨이 사람으로 데워질 즈음 그렇게 내렸다. 그러고보니 한성대 앞이다. 아무렇지 않은 짧은 30분의 버스는 커피집 앞에서 연약해졌다. 와이파이가 잡히는 이 노트북의 눈치없음이 얼마나 우스운가. 문 앞에서 힐끗힐끗 너를 곁눈질했다. 없었다. 내가 찾는 누구도 없었다. 아빠도, 큰아빠도, 너도, 그 누구도.


사실 그 후로 아무생각하지 않았다. 너의 옆에서 너가 누군가와 생이별을 하는 몇 번들을 보았다. 그 주인공이 내가 된다는 것은 알 수 없었다. 너는 그만큼 내가 너의 것이 아니게 했고, 너는 꼭 그만큼 나에게서 힘들었나보다. 너가 왜 쉼을 선택했는지 되돌아보는 것은 할 수 없었다. 너가 없이는 안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너가 왜 그 뜨거운 정오에 전화를 걸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너가 있어서 받을 수 없었다.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여름에서 가을 넘어가는 때였나. 여름이 차오를 쯤이였나. 회의를 하다가 걸려온 반가운 너의 전화를 받고 튕겨나가듯 회의실을 박차고 전화를 받았었는데. 그 때의 전화는 반가웠던 것에 비해 너는 덤덤했고 그래서 이후가 견딜만 했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지금의 경직은 똑 하고 부러질까봐 감히 입을 뗼 수가 없었다.

그래, 별 생각이 없었다. 너의 부재를 실감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너는 애초에 나에게 없어선 안될 사람이 아니라, 없어도 될 사람이었기에, 있는 순간들이 가끔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마치 오늘 같은 날처럼.

그러고보면 너는 새처럼 나의 선택들에 직접적인 훈수를 두지 않았다. 너는 단 한순간도 나의 삶을 가름하지 않았고 지시하지 않았더라. 그냥 깊숙한 흉부 밑 쯤에 흐르는 수맥같은 거였다. 갑자기 이렇게 너를 떠올리며 일기를 쓰니 그간의 오개월의 공간이 야속해진다.

너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나를 대하던 너를 미워해본다. 나의 심신안정 색칠공책을 힐난했었다. 과외학생한테 받았던 무슨 디스트레스 칼라밍북이었는데, 그걸 받았다고 자랑하면서 색색의 색연필을 꺼내니, 너는 당황함과 놀람을 금치 않았다. 그렇게 너의 외로움을 타인에게 드러내느냐고. 심지어 과외학생한테까지 숨기지 않고 혹은 숨길 수 없을만큼이냐고. 나는 또 시무룩해졌더랬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난 여전히 가끔 힘듦과 무력을 숨기지 않는다. 나를 좀 더 이해하고 그래서 너에게 설명했다면 너는 나에게 더 빨리 지루해졌을까. 아님 나를 더 이해했을까. 그러게, 너는 왜 나를 궁금해하기보다 다름에 놀라기만 했을까. 그럼에도 왜 나는 그 때의 너를 따스하게만 느낄까. 그러던 너는, 그 형용모순이 재밌기도 했고 의아했지만 또 불만이었지만, 나의 칼라밍북을 가져가서 너의 멋대로 색칠했다. 시인같기도 했고 괴짜같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노트북을 하려고 했는데, 정사각형의 책상을 색칠하느라 너혼자 다 썼다. 나는 노트북을 올려놓을 수 없어 쭈뼛쭈뼛했다. 그렇게 두어시간동안 나는 노트북을 사용하지 못했다. 그 때 뭘 읽긴했는데. 그리고 아마 커피 전에는 부대찌개를 먹었을 거다.

이런 공간에 홀로 와서 찌질대는 것, 추잡하고 청승떨면서 궁상맞는 행동을 너는 싫어할 것이다. 인상 찌푸리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뭐냐는 말을 내뱉고는 제 생각을 이어갈 것이다.

나는 너를 아는가? 아니 모른다. 달큰한 와프을 먹던 날, 그러니까 크리스마스의 언저리쯤의 날이었을 거다. 그 때 와플을 먹고 너는 누군갈 만나기로 했다고 이전에 말했었고 그래서 나는 과외를 잡았었다. 이후 일정을 채운 나를 보고 너는 화와 실망을 표출했고, 나는 또 미안함을 고개 숙여 표현했다. 과외를 갔다오라고 다시 오라고, 와인과 맛있는 요리를 하자고 제안했다. 탐탁지 않게 승낙했다. 연말이었고 한성대에서 목동까지 두시간이 걸렸고 한시간을 과외하고 다시 한시간반이 걸려 한성대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진영이에게 주려고 했던 바디워시와 로션을 건네었다. 향을 맡더니 "별로다. 지수줘야겠다."라고 진담같은 농담을 종종했다. 맥주를 사서 들어가서 까나페와 일본식 스파게티와 양파참치가 들어간 캐슈넛?을 먹었던 것 같다. 참 잘도 먹었다. 그리고 늦은 밤 집으로 향하는 나를 계속 잡았지만 나는 갔다. 집으로 가는 내내 너는 아쉽지 아쉽지, 하면서 돌아올 것을 채근했다.

이 곳의 자리는 버스가 지나갈 때마다 덜컹거린다. 저 맞은편 골목으로 가면 너를 만날 수도 있을 것도 같다.

그런 나날들이 많았다. 너는 나를 친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좋은 사람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은데, 나를 잡아두거나 나를 원하는 것 혹은 나와의 시간을 잘 보내는 사람 같았다. 그게 너무나도 의아했다. 너는 왜그랬을까.


이제야 궁금하다. 나는 왜그랬을까. 지금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나를 납득시킬 수 있다. 그 사람들의 무엇이 좋은지, 나는 당신의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나는 지금 어떠한지, 나는 당신에게 꽤 그럴듯한 사람이라고 자부할만큼, 나는 가을처럼 꽤 명확하다 확신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너를 나에게 설명할 수가 없다. 너는 같이 있는 시간동안 늘어진 솜처럼 젖어들게 했지만 말라버리면 한없이 거칠고 까끌하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뒤를 돌아보면 분명 없는데, 앞을 보면 코앞에 너무나도 선명한 사람.

작년의 나에게 너무 큰 위안이었고 아름드리 나무였던. 정말, 정말 적확한 설명이라함은, 공간 꼭 그만큼의 시간을 느끼게 했다. 자주 걸었는데, 걸음의 공간만큼 딱 그정도다.


문에 손가락을 찧었었는데, 붓고 멍이 들고 가라앉더니 그걸로 끝날 줄 알았다. 뼈 근처에도 근육이 있어서 근육이 그모양대로 굳어버린 것 같다. 울퉁불퉁해진 손가락을 계속 만지작거리게 된다.

자신이 여전히 없다. 그냥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데, 충분히 들어찼을 때 마주하고 싶은데, 이런 쓸데없는 진정성을 어이없어할 너인 것도 아는데, 그냥, 많은 사람들 속에 너가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마음 때문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