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지람. 이 단어는 모자람으로부터 비롯됐는데 '모지래다, 모지랜 녀석'같이, 모자람의 귀여운 애칭정도의 느낌이다.
사투린가.
모든 말들과 모든 풍경들이 귓방망이를 아슬하게 스쳐가는 겨울바람같다. 하지만 동상에 걸려 저것이 칼바람인지 그저 물리적인 대류의 이동인지 알 수 없다. 그렇게 얼음장같은 말들도 지나가고, 세찬 마음들도 지나가지만, 그저그렇다.
그것이 문제인가? 차갑고 운동장같이 넓은 철제 감옥에 밋밋히 들어선 느낌.
외롭느냐? 아니. 외로움이 뭔지 모른다고 할 수 있겠지.
외로움은 마른 우물같은 말로 변화했다.
모지람. 그 촉촉하고 찝찝한 말을 떠올린 건 과잉과 결핍의 간극을 떠올리면서다.
결핍으로는 문제가 인식되지 않는다. 부족한 건 채우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기에 그건 어쩌할 수가 없다.
어찌해야만 하는 시대의 부름에 자아의 갈증에 나는 때때로 2차원의 존재처럼 느껴진다.
가까운 사람들이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멀대같이 커졌다. 이것은 밥약속을 할 때마다 메뉴를 고르고 술집으로 리드하는 데서 느껴졌던 그 압박의 연장선에 있다.
무언가 말하기를 기다리는 눈빛들
괜찮고 좋고 멋있는 사람이기를 기다리는 생각들
선지적인 현명함을 기다리는 정언들
박동기로 연명하는 심장의 사람들은 늘 그런 공포에 시달린다
멈추더라도 난 살아있는데 살아있음을 증명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절망
스스로 뛰게 해야하는건지, 난 원래 아니었다고 말해야 하는건지, 어떤 고백을 누구에게 해야하는 건지 모르겠는 날들.
나만큼 두배를 뛰어준다면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만큼의 무의미의 나열들.
한가위 귀향단을 하며 이주 째 처음 보는 사람들을 매순간순간 마주하는데, 그 때마다 나는 젠틀한 사람이 된다. 적당한 목소리에 초롱(하다고 생각되는)한 눈으로 예의바르고 똑똑하게 말을 건넨다. 온 몸과 온 마음으로 나는 첫인상부터 괜찮은 사람이라는 아우라를 생색낸다. 그것은 문자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손가락은 타자를 치면서 입은 투덜대는. 시부럴시부럴 거리면서 물결 특수문자와 정중한 말꼬리까지. 그리고 매일 몇십명의 사람들의 눈을 보면서, 그리고 그들에게 나름 소소한 정신적 갑의 위치에 있는 나를 보면서, 저 사람은 날 알까, 내 이름이 뭔진 알까, 내가 왜이러는지는 알까, 티켓을 받고 뒤돌아서 나가면 방금의 몇 분을 깨끗이 잊어버릴까, 를 상상해본다. 그건 본질적 질문이 아니라 단순히 심심해서이다. 견딜 수 없을 만큼 심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애쓰지 않는 사람들이 기꺼웠다. 난 존재의 허무니, 본연의 고독이니, 여전히 풀리지 않는 난제인데, 당신들은 그 난해함에 적응한 것만 같아서. 예를 들어 찬이라거나 리은이라거나.
그리고 나는 과잉됐으면 했다. 부족함은 그것을 목격한 사람으로 하여금 미안하게 만든다. 그 결핍을 지적할 수 없게 한다. 그래서 과잉됐으면 했다. 넘쳐흘러서 그 과잉을 지적해줬으면 했다.
사실 과잉이건 결핍이건 모지랜 건 매한가진데 말이다. 과잉이 많이 가진 것도, 결핍이 덜 가진 것도 아니한데.
무슨 말을 하는건지 모르겠다. 다만 오랜만에 쓰잘데기 없는 주절거림을 휘적이고나니 마음이 한결 나아진다.
난 언제나 결론이 없다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