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이다. 시월에 관한 영화들이 퉁퉁 불은 면발처럼 줄줄이 떠오른다. 그 영화들은 달큰하다. 배도 부를 것이고 라면을 먹는 목적에도 부합한다. 짜디짜고 밀맛이 퍽퍽히 느껴지는. 다만 보고나면 기분이 나쁘다. 거북한 속을 부여잡고 다시 뱉어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소화될 것 같진 않고. 그 주기를 반복하다가 또 언젠가 먹게될 것을 안다.
그렇게 더부룩한 라면이 먹고싶듯 꽉 막히는 영화들이 보고싶은 요즘.
<사도>
<인턴>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홍상수 영화를 본지 벌써 이년 가까이 되어가는 것 같은데 왜그렇게 재밌어 하고 좋아했는지 알 수 없다. <봄날은 간다>를 스물아홉살 때 꼭 다시 보겠다고 다짐했었는데 벌써 그 날이 오년 남짓 남았다. 절반이 흘러 지금엔 그 영화를 다시 보고싶지 않다. 나는 은수의 사랑을 하고 있을 것 같아서. 너무 뻔하다. <북촌방향>을 볼거다.
영화를 잃어버렸다.
"정이 없어"라고 회진이 말한 어제의 그순간이 위잉위잉거린다.
사실 의문이 들었다. '정 든 적이 있어?' '정 드는 건 어떤 기분이야?'라고 묻고싶었다. 정말 모르겠었다.
현희를 일요일 밤에 만나기로 했는데, 현희는 취업준비로 바빴고 나는 선거로 더욱 굳게 닫혔기 때문에 두근거림도 없는 만남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취소했다. 우리는 11월이나 12월에 보기로 했다.
세영이의 소식을 들었다. 부끄러웠다고 했다. 외로움을 타지 않는 이가 외로워했을 시간을 생각하니 그냥 이유없이 저리게 미안했다. 내가 없었던 공백이 그 아이에겐 공백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풍금이와 근둔이가 있었을테다. 그럼에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너무나도 안고싶었고 우리는 그랬구나에 미묘한 화가 났으며 아무것도 잡을 수 없는 우리의 비슷한 처지에 서글펐다. 가끔 공통의 순간들을 그 때보다 더 가이없이 고맙게 느낄 때, 끝없이 슬퍼진다. 세영이에게 자꾸 미안해진다. 내가 거절과 '아님'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꼭 세영이에게 민가를 소개해주고 싶었던 것이 생각났다.
선생님은 변하시지 않았다. 일생을 특별하게 살아왔고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으며 특별한 선택과 사고를 가진 사람의 평범은 너무나도 특별하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특별의 결핍이기에 그걸 외면할 줄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특별함의 견고함에 둘러싸여 아무런 균열도 없었던 사람의 확신은 그렇게나 무섭다. 일년이 지나 돌아오신다해도 별로 달라질 것 같지 않다. 돈이 지나치게 많았던 사람은 돈을 신경(정도밖에)쓰게 되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어했다. 가짐과 받음에 길들여진 사람의 애정과 관심은 약간 섬뜩하다. 그런 사람에게 사랑은 모든 것을 '내어줌'인데, 그건 소통되어지지 않는다. 그 흐름이 막혔을 때의 실망과 힘듦을 난 설득해낼 재간이 없다. 뭐 이렇게까지 내다보며 고민할 필요도 없고 글을 쓸 것도 아니지만, 그냥 늘 느껴왔던 그 사람의 까슬한 거슬림이 무언지 궁금했다. 잘 다녀오시길. 특별함 속에 젖어 약간의 틈도 낯설어하지 마시길. 그 진공을 너무 연민하지 마시길.
추석 때 집안을 뒤집어놨다. 뭐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예정보다 일찍 서울로 올라왔다. 리무진을 놓쳐 기차를 놓칠 뻔 했는데 2만원 택시비를 내가며 꾸역꾸역 올라오고 싶었나보다. 그리고 울산이 그리워져 횟집에 가서 칼칼한 목으로 기침을 켈켈 해대며 술을 마셨다. "20년이 넘게 자신의 방식대로 사랑을 행해온 사람들을 부정하진 말아야겠다. 그건 너무 잔인한 짓이다. 변하자고 바뀔 수 있다고 말하는 건 너무나도 힘없는 공허한 말이다." 이정도밖에 생각이 진전되지 않는다. 가족에 대해서는 생각이 게으르기도 하거니와 나의 고집을 제어할 수가 없다. 왜이렇게 억세지는가.
클리셰를 반복하는 진보집단의 무능함 어리석음 비겁함 못남...난 그런 결정을 내렸다. 그런 입장을 내뱉어 쏘아버렸다. 부끄러워야 한다. 나는 왜이리도 멍청한가. 그 날 밤 통곡을 낙하시키던 화장실에서의 주저앉음이 나는 왜그리도 원망스러웠을까. 초점 풀린 동공에 다 놓아버리고 싶었다. 작년도, 재작년도 이렇게 선거는 어려웠던 걸까. 새삼 위대하면서도 역겨웠다.
이 모든 '없음'들이 거지같았다. 흰 종이만 바라보며 배워왔던 것 같았고, 마주봤던 눈동자보다 그 속의 나의 모습만 이해했던 것 같았고, 해냈다던 변화들은 아무짝에 쓸모없게만 느껴졌다.
정을 만들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이렇게는 영화를 봐도 아무런 감흥이 없을 것만 같았다. 명멸하는 스크린의 색색의 광선들을 멍하게 보면서 밑빠진 독을 채울 것임에.
허지혜의 굿패 공연을 봤던 것, 리은이의 꿈틀 공연을 본 것이 떠올랐다.
민가를 처음 들려준 건 현희였다. '전화카드 한 장'이었을 거다.
자꾸 물컹물컹 울음이 올라와 서럽다. 나도 운동꼰대처럼 감상만 늘어 울음보만 터뜨려대는 건 아닐까.
기타줄을 덜 아픈 걸로 갈아야겠다. 주말쯤이 좋겠다.
기일이 다가온다. 정신을 바짝차리고 있어야겠다.
부산국제영화제 너무너무너무 가고싶다. 고3 때 대학생 때 매년가야지했는데 결국 작년 딱 한 번 당일치기로 술만 먹고 왔다.
늘 그러지 말아야 한다.
늘
느을
느으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