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에서 쏟아지는 별을 찍었는데 점만 찍혔다.

고3 3월 교육청 모의고사를 치던 날이었나. 봄눈이 펑펑 내렸었다. 땅에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사라지는 눈방울 속을 휘젓고 다녔다. 그 땐 고3이 끝나고 어느날 봄눈이 내린다면 조용히 앉아 가만히 응시하리라 다짐했었다.

눈, 별같은 점들, 무서움을 덮거나 채우는 것들, 잔잔히 커지다 애타게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묵념이 아니었을까.


아무렇지 않아지는 때가 온다. 아무렇지 않아지는 것은 그것이 나에게 더이상 어떠한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겠지. 그것은 한 때 나의 시간을 가져갔고 나에게 공간을 내주었다. 그 속에서 꽃의 냄새를 알았고 빗소리의 처연을 들었던 것 같다. 격정의 시간들은 늘 아무렇지 않아진다.

신기하게도 안정감은 균형이 깨지고 새로운 반응이 돌아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음으로써 가능했다. 통제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건 잠깐의 아쉬운 눈가림일뿐, 디딘 돌다리가 가라앉는 것을 느끼면서 비롯된 떨리는 초조함이 날 더 다독였던 것 같다. 저기 멀리서 이제 막 선명해진 초록불보다 깜빡이는 초록불이 더 편안하듯. 평형을 이뤄내겠다는 순간의 의지보다 평형은 언제나 사라진다는 재확신의 체념이 훨씬 희망적인 것처럼.

그래서인지 안정은 망각에게 위협을 받았다. 내가 쥐고있거나 알고있는 패에서 느끼는 안정은 패를 잃는 순간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어쩌면 안정감에 익숙해지는 것조차 위험신호였으니 안정이라 말할 수도 없었다.


서울로 다시 돌아가는 길, 안정도 불안도 설명할 수 없는 얄랑꽁한 기분이 든다. 봄이 찾아오는 계절을 뒤로하고 별이 탁한 곳으로 몸을 싣는다. 3년의 시간보다 마음은 더 빨랐나보다. 오르막을 오를 때인가.


숨바꼭질을 하던 계절이 기억났다. 최선을 다해 숨었다가, 필사적으로 발견되길 바랐던. 누가 너무 금방 닿을까봐, 누가 찾았다고 소리쳐주지 않을까봐, 한시도 마음이 얌전하지 않았다.

템플스테이를 했을 때, 그 때의 계절들을 모조리 떠올렸었다. 사흘동안 걷다가 눈을 감다가 가부좌를 틀고 다시 눈을 감다가.

시계는 거꾸로 돌아 눈 앞을 흘렀다. 궤적을 따라 걷다보면 수많은 무용담들이 곳곳에서 시끌했다.

나를 개조하기 위해 결핍과 과잉의 강박을 없애야한다며 지난 시간들을 곱씹었다. 그냥 곱씹었다. 주마등이 스치진 않았고 말끔한 대화와 표정과 냄새들을 상기하며 그랬구나-인정을 했었다. 나는 나의 타인인냥.

그리고 절을 걸어내려오면서 아무것도 변한 건 없다고 즐거워했었다. 그건 체념이었을지 해탈이었을지 궁금하다.


그리움은 아쉬움의 쌍둥이가 아닐까. 못다한 아쉬움들은 그리움으로나마 조금이라도 채워지겠지만 뱉을 수 없는 그리움은 아쉬움을 반쪽으로 남긴다. 이미 그 때는 그 때가 되었으니. 그러게, 그 때의 사람과 그 때가 그립다고 말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너가 없어야만 그립다 말할 수 있나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때의 너가 없어야.

'보고싶다'라고 말하는 건 그리움을 말하는 것과 다른 차원인건가. 현상적인거니까?


무튼 울산에서의 시간들이 그립지도, 보고싶지도 않다. 놀라울만큼.


이건 서울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쓰다가 잠든 일기.


그리고 오늘은 부고 소식을 들었고 너무 보고싶어서 안개꽃을 사서 너에게 갔다왔다. 오늘 당장 내려가려다가 휩쓸릴 것 같아서 참았는데 내일은 잘 할 수 있겠지.

잘 챙겨먹고 잘 다독여주고 잘 보내드리고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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