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삼월의 18일이라니. 오늘은 비가 내린다고 한다. 봄비가 내리겠지. 이제 아우터도 입을 수 없는 계절이 오겠지.

시간에 날개가 달린 것 같다. 아직 입어주지 못한 니트와 스웨터들이 옷장 속에 발효되고 있는데. 코트들을 들고 세탁소에 갈 생각을 하니 갑자기 울적해진다. 하루에 너댓시간을 겨우 자지만 그마저도 꿈으로 움직인다. 일어나면 무슨 꿈을 꿨는지 되새길 새도 없이 씻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생학위실이 있는 덕분에 쪽잠을 가끔씩 자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뿌연 하늘에 가슴 한 켠이 묵직하여 초콜릿 한 조각과 싫어하는 마카롱을 먹었더니 속이 울렁거려 쇼파에 누워 쭈구려잤다. 섬광이 번쩍해서 눈을 떴는데 심장이 쿵쾅쿵쾅하고 속이 미식거렸다. 어지러운 시간을 붙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유없이 조금 뛰었다.


고등학교 때는 나름의 자기낭만들로 흡족해했던 시간들이 있었지만, 대학 들어오고는 그런 사치 혹은 과잉을 누리지 않았던 것 같다.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나를 의식하진 않았던 것 같다. 언제나 목이 말랐고 언제나 한 구석엔 가을바람이 불었고 언제나 하늘을 자주 쳐다봤다. 이따금 나는 괜찮은 사람이구나-라고 중얼거렸지만 소중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요즘은 수아의 눈동자와 걸음을 유심히 살펴본다. 지난 겨울 수아가 힘들었을 적, 수아의 분출이 아프진 않았었다. 오히려 그래, 그렇게라도 숨길 수 없는 것들을, 가진 것들을 쏟아내서 괜찮아지거나 혹은 그럴 수밖에 없는 거라면, 나중에 덜 미안해하고 괴로워할 만큼만 시간이 어서 흐르길 바랬던 것 같다. 감히 수아와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도 없고 안다고도 말할 수 없지만, 언젠가 수아가 괜찮아지고 나와 친해진다면 깨끗한 말들로, 맑은 눈으로 수아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일년이 지났고 자주는 아니지만 수아와 이런저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요즘이다. 아직도 가끔 조금은 위태로워보일 때가 있다. 무조건반사적으로 걱정이 솟아오르지만 함부로 그러지 않기로 한다. 마음껏 웃고싶다. 다만 또한 함부로 웃음으로 내버려두지 않기로 한다. 그리고 나는 꽤나 수아에게 미약하게나마 봄 기운처럼 소박히 근처에 머무르는 사람이 된 것 같다. 난 꽤 소중한 사람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이다. 솔직히는 수아가 나에게 어느때엔가 소중해질 것 같은 사람일 것 같은 마음이 숨어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느끼는 거겠지만. 무튼 봄이 오고 꽃이 푸러지고 습함이 짜증나질 때까지 김수아와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싶다. 설화 속에서 기인이 옥구슬을 토해내듯, 그 때 그 때의 양념되지 않은 마음과 말들을 건넬 수 있을 것만 같다.


문제는 수아와 나눈 말들, 약속들을 잘 지켜내지 못하고 있는 바쁨들이다. 다시 편두통이 도지는 것 같고 매일매일 토하지 않고는 쉬이 잠들 수 없게 되었다. 현희와 할 얘기도 많고 지금 어떤 시선을 갖고 있는지도 걱정되는데. 닮과 생학위와 인권재단을 무리하게 과신했나 바보같기도 하다. 뭐 이런 미안함과 정신없음들이 핑계라는 걸 알지만 조금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하루종일 맴돈다. 그렇지만! 휴학을 하고 싶은 건 아니다. 정말 아니다. 책상에 앉아 펜을 쓰고 텍스트를 읽고 사람들과 나누는 얘기들, 팽팽 돌아가서 지끈거리는 머리를 툭툭 때리는 게 재밌다.


대체 왜 바쁜거지? 바쁘다고 느끼는 거겠지. 시간에 날개를 달아준 건 나일테니. 조급해하지 말아야지.

지난 학기를 그렇게 급강하하는 내리막길을 자유낙하하고 나니, 별 것 아닌 틈새에도 초조해진다. 언제 무너져내릴까, 언제 포기할까, 언제 나약해질까, 겁이 난다. 모두가 사랑스럽고 모든 하는 일들이 즐겁지만, 그래서 뿜어낸 에너지의 잔열들로 어느정도의 온기를 느끼지만, 엄마 냄새가 나는 거실에서 자고싶고 세영이가 너무너무 보고싶고 또 2014년 그 때가 그립다.


일요일 아홉시반 기차를 끊었다. 아득하게 먼 것 같은 부산으로. 부산. 부,산. 그곳으로.

안개꽃이 좋을까. 시집 한 권을 사야겠다. 정끝별 시인이나 심보선 시인이나 한강 시인의 시집 중 한 권으로. 안개꽃보단 프리지아가 좋겠다. 향이 더 진할테니. 그리고 사회학과 페미니즘을 배우며 재밌었던 이야기들을 들려줘야지. 조금 울고싶다. 너가 떠난지 벌써 하나의 계절이 묻혔다니 아직 믿기지가 않는다. 그리고 어떤 이야기를 해줄까. 나는 어느덧 이별을 고이 접어가고 있다고 말해줄까. 이젠 상실이 허덕일만큼 나를 흐릿해지게 하지 않는다고, 그것보다 이젠 지난 좋았던 기억들이 훨씬 흐붓하다고 말해줄게. 하려했던 말들, 풀지 못한 질문들은 가닿지 못했지만 너에게 털어놓아볼게 들어주렴. 일요일엔 날씨가 좋았으면 좋겠다. 한 음절씩 곱씹기보단 숨쉬듯 이야기할텐데 하늘에 퍼지면 너에게 잘 들리지 않을 수도 있겠다. 알아서 잘 들으렴. 오랜만에 음악을 자주듣는 요즘이야. 재미없고 지루하고 단조로운 멜로디와 갇힌 가사들이지만 꽤 나긋나긋하다.


그리 무섭진 않다. 일기가 끝나고 노래 한 곡을 들으면, 내일의 퀴즈를 집중해서 준비할 수 있을 것이고 캠핑을 체크할 수 있을 것이고 편안히 말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메마른 땅에 축을 세우려했던 시도들이 신기루는 아니었나보다. 고양이를 당장 키우지 않더라도 잘 지낼 것이다. 고양이 이름은 '봄비'가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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