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멸렬한 한 주였다. 요일 감각도 없고 아무리 잠을 자도 피곤이 가시질 않는, 먼지만 가득한.

두툼하게 정리된 김수빈의 짐들을 보면서 나는 어떤 봄을 시작할까, 조금은 자신이 없었다. 십일월부터 넉달의 시간은 조용했지만 비워질 동공을 생각하니 적막해진다. 주말엔 대청소를 해야겠다 마음먹고 어떻게 바꾸고 치울지 둘러보다가 얼룩처럼 눌러붙은 먼지가 눈에 띄었다. 휘날리는 먼지일 줄 알았건만 후후 불어봐도 떨어지질 않는다. 먼지도 굳나보다.


기억을 떠올려보면, 소설 속 주인공들은 죽음으로 끝맺지 않았다. 죽음을 목격하거나 죽음의 직전에서 이야기는 끝난다. 정확한 숨의 종식으로 책을 덮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주인공) 아닌 누군가의 끝으로, 혹은 누군가의 끝 이후의 모습들로 마무리지어지는 글들에 익숙하다. 그러니까 주인공의 눈으로 쓰여진 자신의 완벽한 죽음은 없었다. (이상의 소설은 충격적이었지만 소설같지는 않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나의 죽음은 쉽게만 느껴지고 타인의 죽음은 너무나도 또렷해서 어렵게만 느껴진다.

좀 더 적확하게는, 타인의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 서늘하기만하다. 사자(死者)를 사랑했던 사람의 패일듯한 고통이든, 잘 가라는 한 마디 말을 건네는 사람의 단촐한 안타까움이든간에, 지구 반대편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비보의 거대함과 그로 인한 그림자를 상상하는 것조차 끔찍할 만큼. 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영사기의 광선이 잔인하다고 생각했었다. 죽음이 아무리 기억되는 방식으로 보존되고 살아있다고하지만 그걸 받아들이기엔 아직은 어린걸까.

죽음을 상상해서도 상상할 수도 없다. 장례식장은 그것을 끊임없이 증명받는 곳인데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아직 잘 모르겠다. 왈칵 차오르는 것을 마시고 옆을 보니 준비되지 않은 사진이 놓여져있었다. 가을에는 차마 볼 용기가 안났었는데. 막상 하얀 국화에 둘러싸인 얼굴을 보니 아무렇지 않았다. 그제서야 아차, 싶었다. 남겨진 사람들보다 떠나간 사람이 더 불쌍하고 아프고 힘들겠구나, 싶었다. 나에게만 머물러 있던 비탄이 조금 가소로웠다. 살아있는 자들의 의무라 할 것은 아니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슬퍼하고 기억하는 것만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힘에서였는지 그렇게 단번에 태도와 생각이 바뀔 수 있는지 이해가 안가지만, 우리의 이야기를 이어갔고 웃기도 했고 졸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와 하루를 꼬박 죽은듯이 잠만 잤다.


늦은 오전 전화소리에 잠을 깼고 틈새를 견디지 못하고 쏟아내는 너의 말에 채비를 하고 버스를 탔다. 봄기운이 물씬 풍기는 정오였다.

첫 끼니부터 해장을 하려는 너와 돼지갈비를 먹었다. 회식 외에 선택으로 고깃집에 간 건 거의 처음인 것 같다. 갈비살보다 뼈다귀(라고 부르는 게 맞나?)를 빨아먹는 것과 냉면을 먹는 게 더 좋아서 그리했더니 깨작깨작 먹는다고 혼났다. 환한 대낮에 갈비를 뜯으며 살갗, 그러니까 스킨십에 관한 열변을 토했다.

약간의 스킨십조차 관계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는 것에 이견이 있었다. '어떻게 해보겠다'는 의중이 담긴 표현으로 비춰질 수 있어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어떤 터치도 허용되어서는 안되고 그것은 도덕적으로도 옳지 못하다는 것. 그 반대로, 애정의 표현으로 솔직하게 행동하는 것일 뿐이며 틀 속에서 억제하는 것이 더욱 스킨십의 의미를 가중시키므로 문턱을 없애는 게 훨씬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

결론은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문화의 차이로 일단락 지어졌다. 참고로 나는 스킨십에 매우 엄격하지만 취약하고, 연인이 다른 이에게 1미리라도 가까워지거나 다른 이가 연인에게 털끝 하나 건드리면 초싸이언이 되어 분노할거다. 사실 스킨십의 측면에서라기보다 나의 소유욕의 측면에서라는 다른 기제이긴하지만. 그리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할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면에서 관계에 대해 나는 가끔 냉정하고 이기적이라고는 느낀다. 어떤 행동을 하는 주체의 목적과 함의도 중요하지만 행동의 기능, 다시 말해 상대에게 받아들여지는 해석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낄 수밖에 없고, 그 사람이 느끼는 나의 작용의 결은 내가 아닌 그 사람의 시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스킨십의 상황에서도, 내가 아무리 꼬시려고 행동을 해도 상대가 나에게 '꼬시는 것'이라는 이해의 감정이 없다면 그 행동은 의도대로 읽히지 않을 것이고, 내가 아무 뜻없이 행동을 해도 상대가 감정이 있다면 그 행동은 '꼬시는 것'이라고 오역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주의를 공부하면서 무책임하고 배려없는 태도를 반성했다. 타인에 대한 이해나 고려없이 행동을 쏘아버리고, 뒤틀린 결과와 갈등을 타인 마음의 탓으로 돌리는 건 정말 못됐었다. 물론 어긋남과 엇나감을 자책으로만 감추는 것도 비겁이긴하겠지만.


스끼다시가 된 것 같은 마음으로 계속 걸었다. 그간의 흔들림과 뒤척임을 쉴새없이 말하고 바닥이나 허공을 응시하는 눈을 보았다. 하고싶은 말이 참 많았지만 고이 담아두었다. 언젠간 꼭 조잘대리라.

몇 주 째 결려서 쑤신 어깨에 가방을 메고 한참을 걸었다. 내가 좋아할 곳이라는 걸 넌 알았겠지. 한옥같은 카페에 들어가 무얼했는지도 모르게 시간을 흘려보냈다. 음악 선곡도 정말 좋았다. 문득 너와 함께 오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떠올리며 어둑해지는 바깥을 멍하게 봤다. 깜깜해지기 전에 카페를 나와 또 얼마쯤 걸었다.

"무슨 생각해?"라고 묻고 또 묻는 너가 옆에서 걸으면서 나를 힐끔 본다는 걸 느꼈지만 아무 대답없이 '3년 뒤 쯤에 또 여길 같이 걸어야겠다'라고 생각했다.


오늘 아침 나를 깨운 너의 들쑤심은 꽤 가라앉은 것 같았다. 하루종일 다섯 개 쯤의 인격을 왔다갔다하는 너를 보면서 따라잡을 수가 없어 잦은 침묵으로 대신한 것이 맘에 걸렸다. 저녁보다 집으로 돌아가는 밤이 덜 추웠다. 걸어왔던 길을 반대로 되돌아 가면서 묵혀둔 의문이 풀렸다. 3년 전의 너와 나를 되돌아 본 적이 있는데, 왜 너의 곁에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너를 불편해하는 나, 나를 부정하는 너, 라고 느꼈는데 왜 그 많은 시간을 함께 했을까,가 궁금했었는데 이제야 헝크러진 것을 풀어냈다.

정말 맘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열 수 없을 것 같던 서랍이 조금씩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지리멸렬한 관성을 벗어나는 방법은 한 가지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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