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잠을 자는 존재였던가. 의아하다.

오늘 봄비가 내릴 줄 알았다. 촉촉히 젖어가는 봄을 보면 마음이 누그러질 것만 같았는데, 오늘을 미리 말해주는 복선이었던 날씨였다. 오늘 하루, 너무 고단했다. 하늘을 대신하여 물기를 머금은, 물에 젖은 솜같은 하루.


영화 한 편을 보고 자야겠다. 과제를 밀려서 스트레스를 받고 긴장하는 게 싫었는데 그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닐 것 같은 마음이니까. 너무너무 따뜻해서 욕조에 몸을 담근듯 노곤해지는 영화를 봐야지.


3학년이 되기까지 퀴즈 공부를 제일 열심히 한 것 같았는데 6점을 맞았다. 억울하거나 짜증나진 않고 다음에 더 잘 보아야겠다는 마음이다. 이번엔 장학금을 받아서 돈을 왕창 모으고 자치단체에 묶여 시간에 벌벌 떨지 않은 상태로 여행을 훨훨 날아가야지. 터키나 그리스가 좋겠다. 기미 주근깨를 걱정한 적도 없었지만, 기능 좋은 선그라스를 끼고 온 몸이 뜨거워 눈이 번쩍 떠질 때까지 낮잠을 자야지. 그리고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 맥주 한 잔을 하고 바다 근처를 거닐어야겠다. 석양이 지지 않아도 좋다. 휘적휘적 걷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알 수 없는 가사도 흥얼거려야지. 쌀쌀해진 바닷바람이 부는 밤이 오면 책을 읽다가 텅 빈 방에서 혼자 춤을 춰야지. 지난 날을 회상해도 좋을 것이고 보고싶은 사람에게 편지를 써도 좋을 것이다. 혹은 다시 거리로 나가 모르는 사람과 시시콜콜한 쓸 데 없는 1시간 정도의 담소를 나눠도 괜찮을 것 같다.

당장 적금을 깨고 편도 비행편을 끊고 싶은 충동이 든다. 정말, 강, 력, 하, 게.


나는 정말 화를 잘 다스리는 사람인가보다. 오랜만에 국캠에 갔다왔다. 킹스맨같은 차림을 하고 셔틀버스에 올라탔더니 외계인의 신호를 받은 것처럼 지난 이맘 때쯤이 휘리릭 스쳐갔다. 차를 타면 아무리 피곤해도 더 잠이 오질 않는다. 의식하지 않고 밖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잦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에어컨 바람을 답답해 해서 어렸을 때 고속도로를 달릴 때도 창문을 열고 숨을 헉헉대며 얼굴을 내밀었다. 무튼, 국캠에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 같다. 항상 신입생들이 지내는 곳이기 때문일까. <아일랜드>의 미래인간들이 자랑스럽게 규칙적이고 세상의 끝인듯 쾌락적으로 사는 곳같다. 그럼에도 질서와 평화가 깨지지 않는 곳. 무튼, 무튼, 그 때부터 오늘의 쓰나미가 몰아쳤다.

자세한 일들은 생략한다. 그냥 계속 걷고 뛰고 발목이 접질리고 몸이 좀 뜨거워졌던 것 같다. 땀이 송골송골. 시간이 나면 배유진을 만나서 커피 한 잔 하고 싶었는데 개뿔, 송도랜드 때문에 국캠에 왔으니 기숙사 문을 열어달라고 말하는 나때문에 너를 은근 서운해하게만 만들었다. 회진이가 생각나기도 했고 닫힌 문을 멍하니 노려보기도 했고 도통 먹히질 않는 출입증을 산산조각내고싶기도 했고 하필 워커를 신었나 발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순간순간 울컥임이 차올라, '드디어 터뜨릴 때가 온 것인가!', '인적이 드문 국캠에서 툭툭 눈물을 떨구면 어떨까?' 어이없는 상상을 했지만, 실제로 행동하기엔 너무 정신이 없었다. 그럴 여유는 사치였거나 너무 웃겼기 때문일 것이다. 어찌어찌 무탈하게 프로그램 준비를 끝내고 마지막 대미를 장식할 김치 자르기를 시전한 뒤에, 김치 국물이 찐득히 묻은 채로 버스 정류장으로 종종걸어갔다. 이성과 감성이 적절히 버무려진 때가 되어서야, 이곳에서 교투를 했고 대동제를 했고 등등을 했고를 떠올렸고, 오늘의 서러움과 짜증은 이 망할놈의 RC가 문의 기능을 모조리 봉쇄해버린 엉망을 보였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 한솔이는 너무 피곤했었던 거고 진영이도 어쩔 수 없었던 거고 나도 미리 실무를 준비하지 않았던 탓이니까.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거나 원망할 필요가 없는거다. 나는 혜민스님 뺨치게 마음 다스리기를 잘하는 것 같다. 아멘.


미니스톱 소프트 아이스크림 진짜 엄청 열라 짱 맛있다. 감동했다. 밀크셰이크나 바닐라 맛을 별로 안좋아했는데 이전의 나를 질타할 만큼, 한 입, 입술로 블랙홀 빨아듯이 조심스럽게 탐했을 때, 오늘의 불행들이 순식간에 녹아버렸다. 아니, 더 진화해서, 녹아서 휘발된 불행들을 참회하고 눈물을 흘릴 뻔 했다. 미니스톱 콘도 베스킨라빈스에게 침을 뱉어도 될 만큼이었다.

그리고 샤워를 마치고 <Her>을 받고 쌍꺼풀 진 눈으로 무심히 일기를 쓴다. 요즘 정신차리려고 세수를 격하게 했더니 눈이 조금 이상하다. 여덟살의 봄일 때, 그러니까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몇 년 쌓인 때를 벗겨내듯 벅벅 문지르며 세수를 하고 엄마에게 로션을 발라달라고 쪼르르 달려갔더니 엄마가 기겁을 했다. 눈이 시뻘겋게 핏덩이로 번진거였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게, 왜 세상이 빨갛게 보이지 않았을까. 평소처럼 선명하고 제 색대로 보였던 안방이 아직도 떠오른다. 응급실에 갔더니 실핏줄이 터졌다며 안대 몇 개를 처방해주셨다. 나는 입학한 지 얼마 안됐는데 후크선장처럼 비대칭의 안대를 쓰는 게 부끄러워 안대를 벗었더니 나의 괴물같은 비정상의 눈을 아이들이 무서워했다. 그래서 다시 안대를 꼈더니 그건 내가 괴물의 유충이 된 기분이었다. 한참 잘 자랄 때라 회복이 빨라 다행히도 며칠 만에 눈은 맑은 상아색으로 돌아왔지만, 20년이 거의 다 되어가는 그 때의 기분을 잊지못해, 세수를 하고 눈이 이질적일 때는 덜컥 섬듯해진다. 오늘이 그렇다. 천천히 거울을 들여다보니 벌건 피 색은 없지만, 터진 실핏줄 때문에 눈알이 조금 부은듯한 느낌이 낯익다. 내일 일어나면 괜찮아져있겠지.


오랜만에 옥상달빛의 노랠 듣는다. 고3 때 제일 많이 들었던 인디. 미묘하게 취향이 다른 지영이와도 노래방에서 자주 부르던 몇몇 곡. 고등학교 때부터 어떤 소리를 들으면 소리가 멜로디와 리듬으로, 음계로 환원돼서 괴로워했었다. 노래의 가사와 음정 모두를 총체적으로 느끼고 싶었는데, 그게 안되니까 몇 년 동안 음악감상과 피아노를 멈췄었다. 이젠 그게 잘 된다. Fade out. 음 마치 카메라 렌즈가 피사체를 접사할 때와 같은데, 생각에 집중을 하면 음악이 배경으로 희미해지는 것 같은 것이다. 옛날만큼 센세이셔널하거나 하늘에서 떨어진 음악같은 느낌은 없지만 편안하다. 별이 쏟아지는 하늘을 보면서 듣는 기분. 그러고 싶은 기분인건가.


두 시간 정도 차를 탔더니 세 시간 정도 독백을 했다. 나의 주위를 맴도는 너의 유령에게 건네는 에필로그. 발단 전개 위기 절정을 거쳐 결말을 향해 흘러가는 우리의 이야기를. 고이 구겨 쓰레기통에 던질.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달콤한 망상 혹은 까끌한 추억을 되뇌였다. 생각보다 명확하게 언어들로 정리가 되었다. 다듬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그러고 싶은 날이 온다면 정확한 언어로 설명해야지. 나에게여도 상관없고 너에게여도 상관없다. 어쨌든 이 드라마의 장르가 곧 결정되지 않을까. 커튼콜을 울리는 날,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먹어야겠다. 아주 천천히. 녹아내려 손에 묻지 않을 만큼만의 속도로.


내일은 국토 뒤풀이를 한다. 벌써 이 봄이 지나면 또 국토의 여름이 온다니 놀랍기만 하다. 다시 가게 될까. 어떨지 모르겠다. 그리고 세영이를 요즘 종종 떠올리는데, 솔선본과 솔루션, 닮까지 대충 2년 정도의 시간을 지금처럼 보내왔다는 자각을 했다. 정말 생각없이 정했던 모토 '흘러가는대로 살리라'대로 휩쓸려가는 것만 같아, 거울 속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그리고 잘 결정해야한다. 마음이 약한 것은 자랑이 아니다. 인간적인 것도 아니다. 나의 시간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나가는 풍경 속에 헨젤과 그레텔처럼 하나씩 하나씩 기억을 흘렸다. 나는 오늘 조금 많이 아팠다.

나의 어림으로 인해, 너의 나쁨과 나의 아픔들이 부각된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이해와 공감을 떠나서 외상의 상처를 입었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뼈가 다치고 멍이 드는 종류의 상처가 아니라, 정말 방울맺힌 피가 선연한 상처였구나. 그리고 그러한 일련의 시간들은 다시 되돌이킬 수 없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부산에 잘 다녀오면, 그 땐 조금 덜 치덕거리고 조금 더 홀연하게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상은 중요치 않다.


잠을 잘 자지 않아도 잘 살고 있다.

잠이 나 대신 잠에 드는 바람에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잠과 나는 서로의 꼬리를 물고 빙글빙글 돌기만 한다.

애매한 겨울은 이만 사라져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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